정법. 듣고 쓰기

정법과 생각의 질량

공부생 2022. 1. 6.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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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시간 8시 5분. 저녁을 먹었다.

 

 

가족과 대화를 하다가, 어쩌다보니 말이 길어졌다. 나름 의논한다고 했는데, 내가 말을 많이 해버렸다. 자연스럽게 정법에서 배운 내용을 말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칭찬을 받았다. 이런게 아니었는데...

 

 

1. 어머니는 신앙인이다. 카톨릭 30년 교우이며, 매일 새벽미사를 다닌다. 항상 '내가 할 수 있는건 기도 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대해, 한마디를 보탰다. "엄마는 청하는 기도를 합니까? 감사기도를 합니까?"

 

 

엄마는 '성경에도 나와있어. 청하라고 하셨어' 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말했다.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신데, 내가 왜 청해야합니까? 내 목숨도 하느님 것인데.. 진정 하느님을 위해 쓰여짐을 원한다면, 무엇을 굳이 청할 필요가 있나요? 내가 잘 쓰임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게 더 맞지 않나요?"

 

 

엄마가 말씀하셨다. "네 말이 맞다."

 

 

한 편으로는 후회가 된다. 왜 이런 말을 굳이 꺼냈을까? 괜히 내가 잘난척한 것만 같다. 이럴게 아닌데.. 중요한건, 엄마의 생각이 업그레이드되고, 더 공적인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되었든, 나는 너를 위해 할 수 있는건 기도 밖에 없다."

 

 

감사하면서도, 답답함을 금할 수 없었다. '아.. 이게 생각의 질량인가? 생각을 바꾸는게 이리도 쉬운게 아니었던가?' 시중에는, 부자의 그릇이라는 책이 있다. 사람마다 그릇이 있다는게 핵심이다. '그릇이 대체 뭘까?'라고 오랫동안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생각의 질량이, 곧 그릇일 수 있겠구나...'

 

 

나 또한 마찬가지다. 사적인 생각에서 공적인 생각으로 가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걸렸다. 정법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예 그런 생각을 하지조차 않았다. 가정교육일 수도 있고, 개인의 역량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이 변하기까지도, '정법 3년 듣기'라는 인풋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사람의 생각을 한순간에 바꿔놓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 상대에 따라서, 그리고 나의 역량에 따라서 말이다.

 

 

2. '정법을 듣고 나면, 정법을 안들은 사람과는 대화가 안된다'

 

 

위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아예 정체성이 다르다보니, 대화 상대가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잘나고 상대가 못났다는 개념이 아니다. 단지, 생각 차원 자체가 다른 것일 뿐이다. 정법에선, 항상 '들어줄 줄도 알아라'고 말한다. 나 또한, 이해해주고 들어줄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가 이렇게 힘든 것이, 정말 지식인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온 가정의 희생을 먹고 자란 지식인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비젼 제시를 못할 때, 사회는 망가질 수 밖에 없다. 시스템을 짜고, 비젼 제시를 훌륭하게 하라고 만든 지식인들이다. 그런 지식인들이 제 욕심을 차린다? 그러면 다 같이 죽는 것 밖에 안된다'라고 하신 말씀이 실감이 난다.

 

 

나 또한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이 사회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회는 무엇을 가장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가?를 때때로 고민한다. 여기에서의 사회란, 인류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다. 내 주제가 아직 그런 주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법을 배운 이상 생각은 그렇게 가져가려고 한다. 내가 모자라니 갖추지만, 그래도 방향성은 공적인데 두고 살아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3. 남한 사회는, 현재 청년과 노인 문제가 시급해보인다. 다른 층보다도 가장 복지 정책이 많이 들어가는 층이, 청년과 노인이다. 청년은 취업과 일자리, 경제적 불평등을 문제 삼는다. 노인은 할 일이 없는 것, 모아 놓은 돈이 없는 것, 외로운 것을 문제 삼는다. 돈이 있더라도, 꽁꽁 싸매려 노력하기만 하는 수준이다. 돈을 자식들에게 다 줘버리면, 대접을 못받는다나?

 

 

노인들은 받기만을 원하고, 청년들은 사회를 탓한다. 과연, 이런 현실 속에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만약, 노인이 청년에게 도움되고, 청년이 노인들을 도울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모델이 가당키나 할까? 이를테면, 청년의 심리적 문제를 노인이 보듬어줄 수 있을까? 사회 경험이나, 삶의 경륜들로써 정신적으로 케어해주는 것이다. 청년이 노인들의 수족이 되어줄 수 있을까? 단순히 노인들을 '복지'하는 차원이 아니라, 진정으로 노인을 존중받는 '고객'으로 삼는 시스템을 만든다면 어떤 형태일까?

 

 

'노인 => 청년'

'청년 => 노인'

 

 

만약, 이런 모델로 성공적인 예시가 나온다면? 첫째, 경제적으로 직접 이득이 될 것이다. 둘째, 일자리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셋째, 노인들에게 보람을 줄 수 있다. 노인들은 더이상 장기판을 전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현재 노인 일자리로써 '여성 안심 지킴이' '아이 안전 지키미' '쓰레기 줍기, 낙엽 줍기 봉사'가 있다. 그런 노동 집약적인게 아니라, 직접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는 식으로 하면 어떨까?

 

 

예시1) 찾아가는 할매 식당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요리를 하는 것이다. 요리를 하여, 밥을 못먹는 청년들을 찾아다니며 밑반찬을 전달한다. 필요에 따라, 밥도 해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용기를 불어넣어준다는 점'에 있다. 도시락을 주면서 "힘들지? 요즘 뭐가 제일 힘들어?"라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시는 할머니의 정. 이것을 청년들도 분명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청년들은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고, 살아가야할 목적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힘이 나는 것이다. 밥 한끼와 함께!

 

 

예시2) 손주 삼주 청소단

미취업 청년들이 힘을 합쳐, 독거 노인들의 청소를 도맡는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일수록, 독거 노인일수록, 청소가 힘들다. 몸을 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쾌쾌한 곳에서 그저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 이 환경이 건강을 더욱 나쁘게 한다. 이 때, 청년들을 투입하여, 대청소를 시켜준다. 3주일에 한 번 방문할 수 있다. 짧게 잡은 이유는, 단순히 청소만 해주는게 아니라, '노인 케어'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게 핵심이다. 서로 대화를 하는 것,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 그 어르신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건 최대한 배우는 것에서, 서로가 윈윈이 된다. 청년들은 보람을 느끼고, 노인층 수요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이 모델이 확립될 시, 해외 사업자로 프렌차이즈를 낼 수도 있다.

 

 

한 가지 아쉬운게 있다면, 아직도 노동 집약적인 부분을 못벗어났다는 점이다. 무언가, 디지털화되고 더 자동화된다면, 훨씬 더 현실적인 모델이 될텐데.. 더 현실적인 모델들이 아직 안떠오르는게 답답하다. 내 자신의 실력을 더 키워서, 사회에 정말 쓰일 수 있을만한 상품으로 아이디어가 나왔으면 좋겠다.

 

 

나는 정말 한국 사회가 잘되길 바란다. 나 또한 사회에 내놓은게 없기에, 무언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 욕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내가 늙기 전에 사회에 좋은 모델을 내놓고 싶다. 운정 김종필 선생이 그러하셨듯 말이다.

 

나의 지식들이 사회에 이롭게, 빛나게 쓰였으면 좋겠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